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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 다시 한번!"...광주 충장로엔 노포가 즐비하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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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7.25 17:00

1920년대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광주충장로4가의 현재 모습. /권경안 기자
1920년대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광주충장로4가의 현재 모습. /권경안 기자

◇충장로 상인들, ‘가게역사’를 썼다

“부모님이 잘 만들어서 키우셨는데…. 충장로의 흥망성쇠에 함께 했던 만큼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지켜나가겠습니다.”

1950년 3월 (광주시 동구) 충장로에서 태어난 김우평씨는 대를 이어 한 자리에서 ‘전남의료기상사’를 운영하고 있다. 1946년 충장로4가25번지에서 아버지 김상순씨가 창업했다. 처음엔 유리주사기를 제작했다. “의료기기가 귀하던 시절이라 의사면허를 딴 의사들이 찾아와 매장을 열게해달라며 사정사정했지요.” 아들 김씨는 1968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김씨는 온도계, 비중계 등을 생산, 동남아에 수출하였다. 2000년 이전에는 직원들이 120명 정도였다. 올해로 업력(業歷) 75년째인 노포(老鋪·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이다.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 상권의 핵심이었던 충장로에는 이와 같은 노포들이 즐비하다.

1946년 창업한 전남의과기제작소. 충장로의 가장 오래된 업소이다. /충장상인회 제공
1946년 창업한 전남의과기제작소. 충장로의 가장 오래된 업소이다. /충장상인회 제공

“결혼예물을 했던 고객들이 자녀들의 예물을 하러 다시 찾아올 때면 반갑다마다요, 너무 고맙지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백근호씨는 1965년부터 충장로5가에서 시계·금은방 ‘백광당’을 운영해오고 있다. 1980년에는 미국보석감정사자격증을 획득했다. 시계는 전남 각지로 납품하고, 소매업만 하는 보석도 호황이었다. 1990년대까지는 주말에 점심도 못먹을 정도였다. 백씨는 아이들이 충장로에서 자라서 독립했지만 충장로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보통 30~40년 이상 왕래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원단(原緞·의류의 원료가 되는 천)시장을 따라다니던 딸이 커서 의상학과교수가 되었어요. 이제는 최고의 동지랍니다.” 전남 곡성에서 18살 때 광주로 온 정옥순씨는 양장학원에서 의상제작을 배웠다. 1963년 충장로 5가에 있던 양장점을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첫 상호는 ‘도미(都美)양장’. ‘도시를 아름답게’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도미패션’. 광주에 양장점이 등장한 것은 1955년. 충장로2가 ‘모나미양장점’(이진모)이 시초. 이어 1957년 ‘남성양장점’(이철우), 1960년 ‘모나미양장점’(이화성 호남대설립자), 1967년 ‘처음연구소’(이후 드맹, 문광자), 1969년 롱비치(이후 도투말, 박재원 초대 광주패션협회장) 등이 문을 열었다.

“충장로는 특화된 거리죠. 오래됨의 미학(美學)이 있어요.” 광주토박이 김성남씨는 서른네살되던 1994년 아버지로부터 이불집을 이어받았다. 아버지는 1960년 충장로5가에 건물을 세워 ‘금광상사’란 이름으로 업계에 뛰어들었다. 고흥, 여수, 목포 등 전남지역은 말할 것 없고, 전주 등 전북, 제주도까지 현지 업소들과 거래했다. 1970~90년대까지만 해도 이불은 혼수필수품이었다. ‘이브자리’ 대표 김성남씨는 브랜드도 출시하고, 온라인판매도 하는 등 변화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단골분들이 꼭 당부해요. 오래오래 해달라고 말이에요. 그럴 땐 참 잘살았다 싶습니다.” 유성양복점 김대용 대표는 양복기술자 매형의 소개로 17살 때부터 충장로에서 일을 배웠다. 재단사로 일하다 양복점을 인수한 때가 1966년. 1970년대 그의 양복점에는 기술자가 20여명이었다. “직장을 갖게 되면 양복을 맞춰 고향으로 가던 시절이었지요. 예복을 한번에 4~5벌도 하고요. 한달에 100~200벌 정도 만들었습니다.” 이후 기성복의 등장으로 하향세지만, 지금도 단골들이 찾아온다. 그의 양복인생은 60년을 넘어섰다.

전남 곡성에서 태어난 임종찬씨는 중졸 이후 서울에서 제화기술을 익혔다. 쌀 한가마니를 주고 3년간 배웠다. 스물두살이던 1973년 충장로4가에서 노틀담제화점을 열었다. 신체균형이 맞지않아 본인에게만 적합한 구두를 만들 때의 보람은 그 무엇과도 바꾸기 어렵다는 임종찬씨는 구두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했다. 임씨는 1979년 충장로에서 태어난 아들(임충호)과 함께 일하고 있다.

금은방과 양복점,한복점 등이 즐비하다. /권경안 기자
금은방과 양복점,한복점 등이 즐비하다. /권경안 기자

이처럼 충장로4~5가 500여 가게에서 대를 잇거나 30년 이상 업력을 가진 업소들이 63곳이다. 양복점, 양장점, 제화점, 금은방, 한복점, 이불점, 식당 등 오래된 가게들의 이야기들이 묶여져 나왔다. 충장상인회가 ‘충장로 오래된 가게-충장로를 지켜온 상인들의 이야기’를 펴냈다. 여근수 충장상인회장은 “외국여행지에서 보아온 100년 전통의 오래된 가게들을 생각해본다”며 “충장로에도 2대, 3대째 30년 이상 가게를 잇고 있는 전통가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옛 영광의 충장로가 재건되기를 기대하며 상인들이 직접 나서 발간했다”고 했다. 여 회장은 1976년 광주시 동구 계림동에서 안경렌즈 연마공장을 세웠다가, 1982년 충장로에 입성하여 두 아들과 함께 ‘거북이안경’을 운영해오고 있다. 45년 이력의 장인이자 상인이다.

◇“충장로, 영화(榮華)를 다시 한번”

자신들의 이야기를 ‘역사’로 써내는 충장로상인들의 노력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충장로의 영화(榮華)를 살리려는 노력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상인회는 지난해 오래된 가게들에 동판을 만들어 비치했다. 30년 이상된 가게앞 보도에는 연혁(沿革)을 새긴 동판을 설치하여 가게에 ‘역사’를 입혔다. 상가마다 밤 10시까지는 환하도록 불을 밝히고 있다. 특히 충장로5가중 금·은방의 작업장이 집중되었던 골목은 ‘도깨비 골목’이라 불린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이라는 데서 이름을 붙였다. 지난해 이 골목 보도와 담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쉼터도 만들고, 산책로도 만들었다.

1946년 창업한 전남의료기상사를 알리는 동판. /권경안 기자
1946년 창업한 전남의료기상사를 알리는 동판. /권경안 기자

지난 5월 젊은이들을 위한 문화예술 창작공간도 충장로5가에서 탄생했다. 도로명주소 ‘충장로22’에서 ‘충장22’를 작명했다. 1970년대까지 간장공장과 양조장이었던 곳이 최근 10여년 방치되다가 콘텐츠생산을 위한 작업공간(22개소)으로 변신했다. 지하1층, 지상4층의 건물은 푸른색으로 산뜻하게 재단장했다. 광주시 동구는 74억원을 들여 쇠퇴하는 구도심을 살리기 위한 문화복합공간을 만들어냈다. 청년들이 4~5가에 모여 문화콘텐츠를 생산,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하는 뜻이 담겨 있다. 상인회는 코로나 여파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 오는 8월 이곳에서 ‘오래된 가게’ 출판을 자축키로 했다.
충장로에 복합문화공간 '충장22'를 만들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양조장 등으로 쓰인 건물을 개수했다. /권경안 기자
충장로에 복합문화공간 '충장22'를 만들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양조장 등으로 쓰인 건물을 개수했다. /권경안 기자

‘충장로 오래된 가게’ 편집위원장 전병원씨는 “30년 넘게 가게를 지켜온 상인들은 장인(匠人)이라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충장로는 소비의 공간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생산의 공간이기도 했다. 한복, 양복, 양장, 양화, 귀금속, 안경 등 많은 제조업 장인들이 한땀 한땀 정성을 들여 만들어온 공간이라고 그는 말했다. 평생 한길을 걸어온 일생일업(一生一業)의 장인들이다. 그는 “이제 충장로 역사적 스토리는 문화가 되고, 산업이 되고, 관광으로 발전하는 유무형의 자산을 형성했다”고 자부했다. 전남 영광 태생으로 열여섯이던 1972년부터 충장로에서 양복일을 배우기 시작한 전씨는 1987년 창업했고, 양복부문 대한민국명장이다.

충장로의 태동기는 1910년대. 일본상인들이 1913년 상공회의소를 조직하고 광주중심 상권을 장악했다. 현재의 충장로1~3가에 일본인 중심의 상가가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충장로1가와 가까운 동구 광산동 일원에 관공서가 집중되었다. 반면, 조선상인들은 1920년대 충장로 4~5가에 점포를 열었다. 비단과 무명베, 옷장과 이불장, 고무신과 쌀, 어물이 주된 품목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자체적으로 상인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상인들의 네크워크는 대를 이었다. 충장로에서 상업활동으로 초기자본을 축적한 상인중의 일부는 교육, 문화사업에도 진출, 지역사회에 기여하였다.

1933년 무등산 중머리재에서 함께 모인 충장로의 포목점상인들. /충장상인회 제공
1933년 무등산 중머리재에서 함께 모인 충장로의 포목점상인들. /충장상인회 제공

충장로의 전성기는 1980~90년대였다. 쇼핑과 패션의 중심지였다. 호남권을 대표하는 거리였다. 버스터미널이 충장로와 가까워 전라도인들이 접근하기도 쉬웠다. 1995년 충장로1~5가(1210m)에 상점 1685개가 있었다. 대규모 택지들이 시외곽에 잇따라 조성되고, 전남도청도 전남으로 이전하면서 광주의 도심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충장로 상인들은 2003년부터 충장로거리축제를 열어, 전국을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키우는 등 자구책에도 열성을 보여왔다. 옛 전남도청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2015년 개관하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충장로 1~3가는 패션중심으로 매장이 대형화한 반면, 4~5가는 장인·상인중심의 가게가 유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청소년들과 젊은층은 1~3가를, 중·장년층은 4~5가를 주로 찾고 있다. 충장로의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567~1596)의 시호 충장(忠壯)에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혼마치(本町)로 불렸다. 1946년부터 충장로라 부르고 있다.
전성기를 맞이했던 1995년 무렵 충장로5가의 모습. /충장상인회 제공
전성기를 맞이했던 1995년 무렵 충장로5가의 모습. /충장상인회 제공

임택 광주동구청장은 “‘오래된 가게’는 보통사람들의 땀냄새 나는 삶의 기록이자 우리가 살아온 모습”이라며 “광주동구의 심장 충장로가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으로 거듭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July 25, 2020 at 03: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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